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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사문학/의사(義士)의 아들

    출처:    편집 :编辑部    발표:2019/06/03 17:55:13

    대한해운공사의 동남아영업부장 때였다. 선약이 없으면 점심을 같이 하자는 담당 전무의 전갈이었다.

    그때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소공동 롯데백화점 식당가의 불고기집으로 따라갔더니 모르는 한 남자가 일어서면서 나와 전무를 맞았다. 건장한 체격에 검은 안색의 건강미가 돋보이는 풍모에 농림부 양정과장 윤 종(尹 淙)이라는 명함이었다. 두 분의 대화로 봐서 그가 전무보다 연상인 것 같았다.

    두 어른에 대한 예의로 덤덤히 앉은 내게 그가 바로 윤봉길 의사의 자제분이라는 전무의 소개가 놀라웠다. 언젠가 영화에서 의사가 집을 나서면서 “종 아!”라고 부르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를 향한 매무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내색 없이 정중하기만 했다. 나와 전무의 유리잔에 맥주를 따르고는 대작하지 못 해서 미안하다면서 마시기를 권했다. 그러는 그에게 가벼운 목례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전무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가 간암을 앓고 있으며 태국에 가서 웅담이라도 복용해 보고 싶지만 그곳으로의 여행이 여의치 않다는 전무의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태국의 거래처에 연락해서 그를 위한 초청장을 주선하라는 당부 내지 지시였다. 수출만이 살 길이라면서 나라 전체가 달러 모으기에 혈안이던 시절, 명분 없는 개인의 해외여행이 허가되지 않던 세태였다. 하기야 아시안게임을 유치해 놓고도 나라의 형편상 무리라는 판단으로, 30만 달러의 위약금을 얹어서 태국에 넘긴 일이 오래지 않은 때였다.

    전무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그를 돕고 싶었다. 경위야 어쨌든, 예순 가까운 나이의 그가 기껏 농림부의 과장이라는 사실이 나로서는 못마땅했다. 당시에는 공무원을 지금만큼 대단하게 보지도 않았거니와, 서른 남짓의 내 또래 지인들이 경제기획원 등 소위 잘 나가는 부처의 그만한 직위에 있는 격에도 맞지 않았다. 막내가 외아들인 칠남매를 두면서 그의 부인이 공항 어디에서 커피 점을 한다는 형편 또한 안타까웠다. 나라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깜박이던 시절, 번개의 섬광으로 민족정기를 만방에 떨친 순국선열에 대한 나라의 보은이 이래도 되는가 싶었다.

    태국의 대리점 사장에게 간곡한 텔렉스를 넣어 초청장을 부탁했다. 무역 관련 의제까지 언급하면 더욱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런 얼마 후, 그가 출국했다는 전무의 전언에 안도하고 잊었던 일이었다.

    그가 나와 전무를 저번의 식당으로 초대한 것은 그로부터 서너 달쯤 뒤였다. 얼굴이 조금 더 그을렸을 뿐, 여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 사람의 잔에 똑같이 맥주를 따르고는 함께 마시기를 선도하는 것이었다. 전무가 질겁하며 만류하고 나섰지만 그는 개의할 바 없다는 듯 태연했다.

    “이 잔을 마신다고 오늘 내일에 죽을 일도 아니요, 이것 안 마신다고 무사할 것도 아닙니다. 고마운 분들과 술 한 잔 나누려는 것이니 말리지 마시오.”

    나와 전무에게 여러 잔을 따르고 권하면서 자신의 한 잔을 말끔히 비운 그가 악수를 교환하고 떠나자, 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또한 두어 달의 열대 휴양과 웅담 복용으로 병세가 좋아졌는가도 싶었다. 그러나 태연을 가장하는 것만 같은 그의 뒷모습이 못내 애잔했다. 그러면서 거사를 이틀 앞두고 현장을 답사하며 읊었다는 윤봉길 의사의 구절이 떠올랐다.

        처처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다시 못 볼 혈육에의 미련도, 열혈의 패기도 박제된 채, 오로지 응축된 고독의 아우라가 태연한 척 멀어져가는 당신 아드님의 양어깨 위로 포개어지는 것이었다. 이 나라 선열들의 혈통은 정녕 이래야만 되는가 하면서 안쓰러웠다.

    전무로부터 윤 종 씨의 부음을 전해들은 것은 그로부터 달포나 됐을 즈음이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갑을 지내지 못 한 그의 요절이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그의 유년이 불쌍하게 떠올랐다. 아버지가 중국으로 떠나자, 동네 또래들에게 “너희들은 아버지가 있어서 좋겠다”라고 부러워했다는 네 살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극악의 테러범으로 단죄한 식민치하에서 편모슬하 그가 겪은 고초는 얼마였을까. 그렇게 한 살이를 마감하는 그가 매스컴의 한 줄 관심도 없이 잊혀져가는 현상이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나 또한 그런 비정상의 가담자인 양 씁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의 장녀, 바로 의사의 장손녀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한다는 보도였다. 본인의 자질이 그만하기도 했겠지만, 선대의 국가유공에 대한 보훈이기도 하리라면서 흐뭇했다. 민족의 정기라는 것도 흐르는 물과 같아서, 가끔은 땅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또 가끔은 땅 위의 강물로 햇살을 받으면서 유유히 이어지는 것인가 싶었다.

    지독한 미세먼지 속의 풍문이 놀랍고 우울했다. 별 허물도 없는 독립기념관장을 사퇴 종용으로 내쳤다고 한다. 삼 년 임기에 고작 두 달을 남겨두고 자행되었다는 보도와 증언에는 아연치 않을 수 없었다. 이러고도 우리에게 장래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내일모레가 백주년 삼일절이라 별스레 떠들어대면서.(1902)